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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 우즈 3편 : 미국의 탈역사적 보통사람

타이거 우즈 광고 모델 사진

미국의 탈역사적 ‘보통사람’

1996년 가을 동안, 타이거 우즈 관련 보도는 1996년 라스베이거스 인비테이셔널 및 1996년 월트 디즈니 월드·올즈모빌 클래식 대회 이후로 각 매체에서 비정상적일 만큼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골프 코스에서 우즈가 이루어내는 성과 못지않게, 대중 매체는 미국을 휩쓸 듯한 “타이거 열풍”을 기록하여 결과적으로 그것을 조장하는 데도 강박에 가까운 관심을 보였다. 타이거 열풍은 각 대회와 매체의 집중적인 보도에 대한 관람이나 시청의 극적인 중가로 표현되었는데, 역설적이게도 이를 부추긴 장본인은 다름 아닌 대중 매체들이었다(포터 1997, 스티븐스와 윈헬드 1996, 윌리엄스 1996).

우즈의 ‘명사 시민권celebrity-citizenship’이 확장의 징후를 보이는 순간, 나이키는 두 번째 타이거 우즈 광고를 시작했다. 나이키가 만든 타이거 우즈 광고 MK II는 1996년 추수감사절이 낀 주말, IMG의 방송용 이벤트인 “스킨스 게임”이 ABC 네트워크를 타고 전국에 중계되는 황금 시간대에 미국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나이키는 미래의 다문화적 미국 시민의 분명한 체현으로 우즈라는 증식하는 문화 자본을 활용함으로써, “세계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광고 때문에 빚어진 역풍을 잠재우는 데 성공했다. 더욱 평범하고-그렇기 때문에-더욱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지배적인 문화 규범 및 가치에 굴복함으로써, 나이키는 우즈가 최신 버전의 ‘미국의 새로운 얼굴’로 가공되는 데 기여했다.

명백히 재편된re-engineered 우즈의 인종적 이미지는 “나는 타이거 우즈I am Tiger Woods”라는 제목의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 조장되었다. 60초짜리 광고는 흑백과 컬러 이미지가 정지 화면, 느린 화면, 정상 속도의 화면으로 혼합 편집된 영상과 드럼 비트, 코러스 하모니가 어우러진 절제된 배경 음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결과는 그때까지 타이거 우즈가 재현해 온 것들에 대한 경건하기까지 한 찬사였다. 이러한 신격화는 다양한 인종적·지리적 배경을 가진 일군의 아이들을 (골프 코스나 눈에 띄게 도회적인 세트에) 등장시키는 데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서 아이들은 타이거 우즈가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이질성에 대한 나이키적 시각의 집단적 체현물이라 할 수 있다. 추론하건대, 그들은 더구나 미래의 미국인을 의미하는 기표이기도 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스파르타쿠스>(1960)와 비교적 최근작인 스파이크리 감독의 <맬컴 X>(1992)에서 채택된 바 있는 “나는 ……이다” 전략을 차용하여, 전략적으로 어린이의 대표자로 선택된 아이들은 각기 다른 어조의 엄숙한 목소리로 “나는 타이거 우즈”라고 선언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시아계 미국인, 유럽계 미국인의 전형적인 특징을 지닌 남녀 아이들이 “나는 타이거 우즈”라는 주문을 외는 동안 골프를 하는 우즈의 모습이 잠깐씩 스쳐지나간다. 이 광고는 나무가 늘어선 페어웨이 한가운데로 우즈가 드라이버샷을 날리는 느린 화면으로 끝맺는다. 스윙이 정점에 이르는 순간 “나는 타이거 우즈라”는 흰색 자막이 화면 아래쪽 중앙에 나타나고, 어김없이 나이키의 국제적-국가적 기호인 스우시가 뒤따른다.

불과 3개월 전, 비록 즉시 다른 광고로 교체되긴 했지만 “세계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광고에는 그나마 우즈를 거침없는 인종적 반란자로 읽어 낼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즈는 그를 모방하려는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동시대 인종 정치에 선행하는 탈역사적 체현물로 짜맞춰진 다문화적 인간형으로 재절합되었다. 게다가 골프계에 있어서도 의미 있는 변화가 요구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목격해 온 바와 같은 인적 구성상의 직접적인 변화에 그치지 않고 골프의 미래에는 지금까지와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른 인물들이 포함될 것이다. 실제로 ‘나이키 식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화된African Americanized 재현으로부터의 탈피’라는 유(1996)의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론적으로 우즈는 “신이 골프라는 스포츠에 내린 다문화적 선물”(앞의 글, p.4M)로 주조되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다문화주의라는 기호 아래 그리고 미국 골프의 미래 속에 포함될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가 우즈에게 “미국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줄 만한 정황 또한 탈역사적 다문화주의의 정서적 호소력이 조성한 것이었다.

오프라 윈프리: 이제 한 번 정리를 해볼까요? 당신은 스스로를 어떻게 표현합니까?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하나요? 저는 당신이, 그러니까 아버지가 반은 흑인, 4분의 1은 중국인, 나머지 4분의 1은 어메리칸 인디언의 피가 섞인 분이고, 어머니 또한 반은 태국인, 4분의 1은 중국인, 나머지 4분의 1은 백인의 피를 이어받은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바로 그 때문에 미국의 아들인 거죠.
타이거 우즈 : 예, 맞습니다.
오프라 윈프리 : 당신은 미국의 아들이에요.

(<오프라 윈프리쇼> 1997년 4월 24일)

윈프리가 우즈와 미국을 다문화적 혼종물이라 지칭하고 그렇게 이해하는 데 대해, 우즈는 자신의 다문화적 자격 목록을 제시함으로써 상상적인 계기에 진정성을 부여한다. 즉 미국의 (세계가 미국이 되던 과거와 미국이 세계가 된 현재로 표시되는) 팬터지 계열 fantasy continuum을 떠올리면서, 우즈는 자신의 위치를 이렇게 정의한다.

타이거 우즈 : 예, 일단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르네요. 9월에 유럽에서 있을 라이더컵 대표팀에 뽑히긴 했지만, 저는 사실 그 팀에서 유나이티드 스테이츠’United States를 대표하는 게 아닙니다. 유나이티드 ‘네이션스’United Nations를 대표하는 거죠. 아시다시피 둘은 좀 다르죠. 좀 우스운 건 자라는 동안, 제가 이런 이름을 생각해 냈다는 겁니다. 저는 ‘캐블리네이시언Cablinasian’이라구요. ‘캐’는 백인 caucasusian, ‘블bl’은 흑인black, ‘인in’은 인디언 indian, 마지막으로 ‘에이시언(아시아인)asian’. 이렇게 해서, 캐블리네이시언이 되는 거죠.
오프라 윈프리: 스스로를 그렇게 부른단 말인가요?
타이거 우즈 : 예.

(오프라 윈프리쇼> 1997년 4월 24일)

타이거 우즈는 특정 국가에 귀속되기를 거부하면서 신화적 세계화에 호소하고, 스스로를 세계 시민이라 선언한다. 그와 그가 주장하는 복잡한 정체성이 국가주의 담론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한 것은 두 가지 모두 국가주의 담론의 일부라는 점이다. 세련된 다인종적 범주로서의 우즈(즉 캐블리네이시언-옮긴이)는 한편으로 정체성이 유전적·문화적 유산의 사실적 재현임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역설적이게도 (시간과 장소에서 분리된) 추상적 개인이라는 관념을 강화하고 (‘미국의 다문화적인 새 얼굴’ 속에 심어진 정체성처럼) 마치 정체성이 자유 의사에 따라 선택되는 것처럼 상상한다. 이것은 우즈가 세계화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실, 그는 국제 사회의 일부이며 다양한 곳과의 다양한 관계 속에 있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는 어디까지나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것이지, “다 자란” 어린아이의 순수 창작물일 수는 없다. 보다 글로벌한 충성심을 상상하고 현재의 친숙한 인종적 범주들을 시대착오라고 상상하는 메커니즘을 통해 국가 이익이 (대중에게 옮긴이) 이식되는 것이다. <타임>, <미라벨라> 같은 잡지와 베티 크로커 같은 의류 브랜드가 만들어 내는 여성적인 문화적 혼종물들처럼, 우즈는 지금 미국과 세계자본주의에서 미국이 점한 위치에 대한 온갖 문화적·경제적·정치적 위기에 대해 윤리적으로 충분한 해답을 제공하는 것처럼 비치고 있다.

 

참조 : 타이거 우즈 4편 : 미국 스포츠의 혈통을 상징하는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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