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의 위대한 검은 희망
“세계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광고에 대한 풍부한 대중적 반응은 지난 20년 간 미국이 내세운 인종 정치의 망령을 제압하려는 피부색 초월의 신조와 시민권의 성문화로 인해 발생한 힘을 보여 준다. 반동적인 비평가들은 그 동안 매체의 O. J. 심슨 공판 보도를 통해 유례없이 홍보되고, 정당화되어온 “인종 카드race card”의 수사학에 으레 호소하곤 했다(히긴보섬 외 1997). 한 비평가는 그에 대한 비판을 다음과 같이 정연하게 요약했다. “타이거 우즈의 경우, 인종 카드가 재빨리 던져진 예라고 할 수 있다. 상업적인 카드 한 벌의 맨 아래로부터, 앞면을 위로 한 채….” (스파우스타 1996, p.1C).
인종 카드는 미국 내에서 인종을 둘러싼 담론을 지배하는 규제 논리의 주된, 그리고 노골적인 표현이다. 비판적인 범주로서 그것은 인종적 분열의 조장이 부적절하고 부당하다는 뜻을 함축한다. 나아가 그것은 인종 의식 자체가 인종적 평등에 장애물이 된다는 함의를 지니기도 한다. 소수자 보호정책을 반대하는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우즈가 피부색 때문에 겪어야 했던 갖가지 제약에 관심을 유도하는 것은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할 개인주의와 능력 중심 사회라는 교리에 위배된다.
그러므로, 적어도 어떤 측면에서는 “세계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광고는 ‘인종 카드’ 전략에 의존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광고는 백인 남성을 희생자화하는 상상된 과정imagined victimization of white males의 표현이다. 이에 관한 다른 쪽의 비판 또한 가까스로 수면 아래에 잠복해 있던, 불안한 백인 남성성의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즈의 운명이 그의 재능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대중적이고 반복적인 반응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일이 돌아가는 과정이 참으로 재미있다. 타이거 우즈가 지닌 호소력의 일부는 바로 그의 인종이다. 만약 그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여느 골프 선수였다면, 지금처럼 하룻밤 사이에 엄청난 마케팅 효과를 거두는 인물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가 백인이었다면, PGA 투어의 각종 특전을 누리기 위해 상금 랭킹 125위 안에 들려고 안간힘을 쓰는 또 다른 파란 눈의 골프 선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노트 1996, p.B1)
유명한 스포츠 저널리스트 존 파인스틴은 나이키의 홍보 전략에 관한 자신의 논평에서 인종을 가리켜 최고의 마케팅 잠재력을 지닌 핵심적 측면이라 명명함으로써, 낯익은 반소수자 보호조치의 수사학을 표현했다. 파인스틴에게 우즈는 이러한 존재였다.
(그는) 골프의 위대한 검은 희망the great black hope for golf이다. 나이키가 우즈를 흑인 선수로서, 재능 있는 선수만이 아닌 흑인 선수로서 마케팅하고 있다는 것은 곧 그에게 쏟아 붓는 모든 돈들이 골프뿐만 아니라 우즈가 가진 피부색과 역할 모델로서의 가능성과도 연관 있음을 보여 준다. (<나이트라인> 1996년 9월 2일)
이상에 담긴 분노 어린 표현들은 오늘날 백인 남성 정체성과 한데 뒤엉켜있지만, 비난의 표적이 우즈였던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인종 의식이 나이키가 벌인 기회주의적 정치의 부산물처럼 여겨졌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예를 들어, 스파우스타는-우즈가 아닌- 나이키를 인종 카드 도박꾼이라 명명한다.
그런 일들이 행여 거북스럽게 느껴지더라도 너무 심하게 몸부림치진 말기를..…………. 진실은 나이키가 등을 떠밀지만 않았어도, 우즈가 스스로를 우리의 사회 의식 따위로 묘사하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여러분을 멈칫거리게 만드는 것은 메신저가 아니라 메시지 그 자체이므로, 우리는 타이거 우즈를 한 사람의 인간이자 골프 선수로서 포용하고 축복해 주어야 한다. 그가 챔피언의 지위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피부색을 막론한 모든 팬에게 분명 멋진 모험일 테니까. (스파우스타 1996, p.1C)
뜻깊은 전환의 계기에서 《애드버타이징 에이지> 편집장 랜스 크레인은 우즈로 하여금 “전투적이고 분노에 찬 태도를 취하게 만든 장본인이 나이키라고 지목했다(1997, p.13).
나이키가 우즈의 정체성을 잘못 관리했다는 식의 주제 설정은 국가적인 인종 정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회피하려는 수사적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그것은 우즈를 나이키의 희생자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우즈의 정치적 결연함political assertiveness에 깃들인 가능성을 부인한다. 이러한 정치성 “결여” 선언은 곧 우즈가 비정치적인 인물임을 나타내는 여러 측면을 통해 그의 개인적 행위들이 갖는 장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겠다는 것이다. 우즈를 정치와는 상관없는, 나아가 정치에 우선하는 인물로 분류하는 것은 그가 가진 개인적 · 국가적인 “선”을 의미하는 기표로서의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즈가 순수하고, 고결하고, 무고한 희생양으로 절합되기 때문에 수많은 소비자들이 가진 욕망과 동일시의 가능성이 창조되고 동원되는 것이다.
광고 회사에서는 우즈가 그 광고를 허락했다고 주장한다. 우즈가 스무 살이라는 나이에 비해 조숙해 보일지는 모르나 그는 여전히 스무 살 젊은이로, 세상 물정에는 다소 어둡다. 그는 인종이나 골프 문제에 대한 훌륭한 설교자로서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려 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을 가리키는 ‘골프의 위대한 검은 희망‘이라는 말도 멸시한다. 그는 단지 사상 최고의 골프 선수가 되고자 했을 따름이지, 사상 최고의 ‘흑인’ 골프 선수가 되려는 욕망을 표현한 적이 없다. *****. 세계는 이제 우즈의 발 아래 있을 뿐 아니라, 그의 곁에도 있다. 어째서 나이키는 프로 경력의 첫날부터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라고 위협하는, 몰상식하고 쓸데없는 논란에 그를 끌어들이려 했을까? (스트리지 1996, p.D10)
이에 대해 나이키는 비평가들의 비난에 반박하면서, 자신들은 비난받을 만한 광고를 고의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이키의 홍보 책임자 짐 스몰은 그러한 갈등이 바로 나이키의 성공을 보여 주는 증거라는 말로 논란을 포용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우리가 만든 광고가 사람들을 불쾌하게 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우리 의도가 성공했음을 보여 주고 있죠. 우린 허를 찌른 셈이 되니까요”(커스트레드 1996, p.27에서 재인용). 하지만 논란에도 불구하고 우즈를 둘러싼 대중의 반응을 살펴보면, “세계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광고가 미국 소비자에게 그다지 심한 반감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차라리 미국이 가장 좋아하는 새로운 오락거리 – 미국 소비자들의 환호를 끌어 낼 수 있는, 코넬 웨스트(1988)가 말한 미국이 자신의 이야기에서 동원하는 ‘실용주의적 상징’ – 를 찾기 위해 나이키와 타이거 우즈가 결탁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세계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광고는 인종주의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사회적 비판과 관련된 표현은 친근하고 수용 가능한 것들을 사용하고 있다. 기존의 내러티브 – 특히 미국인들이 스포츠를 통해 소비하고 싶어하는 – 를 활용하여, 우즈의 프로 골프 입문은 국가적 중요성을 띤 사건으로 주조되었다. 소비자의 동일시를 유도하고 확보하기 위해 애국적인 감상이라는 덮개로 포장함으로써, 그의 존재를 재키 로빈슨, 아서 애시 같은 선구자들에게 내려진 부당한 평가를 바로잡는 교정자ighter이자 인종적 진보의 상징으로 부풀린 것이다. 실제로 우즈의 주변에서 재키 로빈슨에 대한 환상이 눈에 띄게 확산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미국 소비자들에게 약속하는 즐거움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세계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광고는 그 자체가 인종· 스포츠· 남성성·국가적 치유책· 합당한 시민권 등이 결합된-인종적 진보를 다룬, 본질적이지만 감질나는 미국의 우화인 셈이다. 우즈와 나이키가 스포츠 최후의 변경(미국식 생활 방식과 어메리칸 드림이 전형적으로 읍합된 머나먼 변경 지역)을 통과함에 따라 인정 많고 교양 있는 시민으로 추앙받는 소비자들은 과거의 매개된 국가민족적 순간들을 회상하면서, 현재의 국가적-가족적-민족적 순간에 참여하도록 초청된다.
이런 식으로 타이거 우즈는 국가의 변모, 진보, 평등을 보증함으로써 정치적 역풍에 휘말린 상업화된 인종적 남성성의 최신판이라고 할 수 있다(앤드루스 1996, 콜 1996을 참조하라. 한 평론가는 마음을 다해, 열렬히 타이거 우즈를 전하는 미국 지배층의 심리 속에 “내 친구 중에는 말이야……” 식의 보수적 성향이 있음을 날카롭게 꿰뚫었다.
미국에서 교회 다음으로 차별이 심하다는 컨트리클럽에 다닐 능력이 있는, 그러니까 “회원 전용”의 그 ‘회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이제부터 타이거 우즈가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조깅 자유주의자들아, 우리가 골프장에 누굴 초대했는지 한 번 보라구. 이래도 우리를 ‘골프 인종주의자’라고 부를 거야? (립사이트 1996, p.11)
콜린 파월, 마이클 조던, 오프라 윈프리처럼 우즈 또한 ‘피부색을 초월한 능력 중심 사회’가 존재한다는 명백한 증거로서, 핵심적인 미국적 가치와 이념을 옹호하는 포퓰리스트들(즉, 시청률과 득표율에 좌우되는 매체와 중도주의적 정치 내에서 활동하는 문화 생산자들)에게 이용당했다. 그리하여 사회적·경제적 경계에 따른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는 시대(켈리 1997, 윌슨 1997을 참조하라)에 타이거 우즈는 미국 대중이 친밀감, 자부심, 안도감을 끌어 낼 수 있는 대중적 아이콘으로 등장했다.
우즈가 행동주의자로 인식된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적으로 허용된 행동주의가 명확히 매체, 가족, 소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는 친숙한 극적 · 영웅적 내러티브 – 소비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 가 예외적 체험을 배경으로 각색된 경우에 속한다. 외견상 인종주의로부터 탈피한 국가적 맥락에서, 우즈와 나이키는 골프라는 사적이고 보장된 엘리트들의 공간에서 인종 차별이라는 국지적이고 일시적인 상황을 식별해 냈다. 이제 그것에 대해 주어진 당장의 해법, 즉 골프를 이제 인종이나 성에 관계없이 누구나 골프를 둘러싼 다양한 소비 행위에 참여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는 식으로) 대중적 장으로 만드는 작업이 “생생히 매개되는 일만 남은 것이다. 대중적인 논쟁과 개입을 가장하여, 미국의 자축적인 분위기는 승인되었다. 따라서 “세계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광고는 현대의 국가 정치와 인종주의의 복잡성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촉발시킨 것이 아니라 매개된 애국심에 의존하여 그것을 재생산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과거의 유물로 정식화되었던 인종 차별이 ‘인종을 초월한 나라’라는 미국에 대한 미국 스스로의 시각에 새로운 권위를 부여하는 데 이용되었던 것이다.
참조 : 타이거 우즈 4편 : 미국 스포츠의 혈통을 상징하는 아이콘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