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적 남성성으로 찬미받다
조던을 오늘날의 인종적 의미에만 국한시켜 탐구한다면 불완전한 분석에 그칠 것이다. 실제로, 조던의 기호 가치는 젠더와 관련된 특정 담론들에 맞춰 반복적으로 구축되었다. 영화나 텔레비전 등의 대중적 형식을 통해 남성적 업적이 끊임없이 찬미받는 소비 문화에서, 광고주·평론가·매체들은 조던의 농구 기술을 낭만적이고도 과도하게 추켜세웠다. 조던의 경기력에 대한칭송은 때로 신격화의 수준에 이른다. 실제로, 신인 시절 보스턴 셀틱스와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그가 63득점을 기록하자 라이벌이었던 래리 버드는 “저건 마이클 조던의 탈을 쓴 신이다”라고 말했다. 또 뉴욕 네츠의 제이슨 윌리엄스는 조던을 가리켜 “나이키를 신은 예수”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조던의 플레이에 대한 과장스런 찬미의 백미로는 작가 데이비드 홀버스텀의 묘사를 들 수 있다.
(조던의 플레이는) 눈부시고, 발레를 보는 듯하며, 말할 수 없이 격정적이다. 조던은 위대해지는 데 필요한 모든 자질을 최상의 비율로 겸비하고 있다. 나아가 마치 유전학자로부터 ‘초경쟁력’ 주사액을 DNA에 주입받기라도 한 듯, 그는 근래의 어떤 운동 선수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결코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무적의 인간으로 재현되기에 이르렀다. (홀버스텀 1999, p.417)
이러한 무분별한 찬사를 통해 조던의 농구 기술은 “순전히 천재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스포츠가 오랫동안 남성성과 남성 신체에 대한 찬미와 결부되어 왔다는 점에서, 이 같은 신격화는 그리 새로울 것도 없다. 베이브 루스, 미키 맨틀, 조 네이머스와 같은 지난 시절의 미국 스포츠영웅들을 떠올려 보라. 그들의 업적이 대중 매체나 사적인 대화에서 영웅주의, 용맹성, 문화적 중요성과 등치되는 예가 얼마나 많았던가? 조던의 신체에 초점이 집중되는 것은 남성신체의 물리적 능력에 대한 미국의 해묵은 강박증을 재현하는 또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스포츠에 여성이 지속적으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선수 남성성(athletic masculinity)의 지배적 구조물들은 스포츠를 남성 고유의 영역으로 구축해 왔다. 또한 이러한 공간에서 출신 배경을 불문한 뭇남성들에게 남성의 사회적 우월성의 기호로서 남성 선수의 육체성과 스스로를 (잘못) 동일시하도록 조장해 왔다(메스너 1998).
남성 스포츠 스타들에 대한 숭배가 이처럼 반복적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점으로 미루어, 전 시카고 불스 감독 더그 콜린스가 “그는 당신의 심장을 잘라 내어……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어한다”는 (마초 같은 허세로 가득한) 말로 코트 위에 선 조던에 대해 존경을 표한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당시의 보수적인 분위기로 보자면, 조던의 승부욕과 강력한 슬램 덩크를 그린 재현물들은 실제보다 과장된 오늘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넘쳐나는 신화적 남성성을 암시한다(맥도널드 1996). ‘람보’실베스터 스탤런이나 ‘터미네이터’ 아널드 슈워제네거처럼 조던은 특정 유형의 – 힘있고 경쟁적이며 용맹스런 – 강인한 남성 신체를 의미화한다. 레이건에서 부시 정권에 이르는 시대에, 강인한 신체 아이콘은 람보라는 영화상의 인간형 – 군대의 부조리, 직무 유기, 정부의 극단적인 권력 남용에 맞서 싸우는 백인 남성 이성애자 – 을 통해 잘 드러난 바 있다(제퍼즈 1994).
가정에 헌신하는 남자
그러나 조던은 코트 위에서 힘과 재능과 과단성 넘치는 신화적 남성성의 체현으로 찬미받는다면, 경기장 바깥에서는 상냥하고 친근감 있는 선수로 재현된다. 실제로 광고, 언론, 기타 공적 공간에서 조던의 기호 가치는 곧잘 어린이나 그의 가족이 갖고 있는 기호 가치와 밀착된다. 이러한 틀짓기는 중요하게는 온유하고 점잖은 남성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가 어떻게 하면 백인 문화를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으면서 주류의 관심을 끌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맥도널드 1996). 선수 생활 내내 조던을 관리해 온 사람들이 그가 가진 마초 선수로서의 페르소나를 농구 코트와 연결시키려 애써 왔다면, 조던 자신은 틈날 때마다 가족의 염려와 지원이 선수로서 그가 거둔 개인적 성공의 바탕이었음을 상기시켜 왔다. 조던의 에이전트 데이비드 포크는 언제부턴가 조던의 부모인 “제임스와 돌로리스(들로리스의 오기이지만 그대로 인용한다)가 자녀들에게 너무나 자상한 부모로서-규율 있고 예의바르며 피부색에 개의치 않는- 위대한 가정의 가치를 실천해왔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러한 이미지를 선전하는 데 주력해 왔다(게이츠 1998). 두 번째로 NBA 은퇴를 선언하는 자리에서 조던은 국제 언론 매체를 상대로 다음과 같은 발언을 남겼다.
불행히도 저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들은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저를 통해서 그들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 어머니는 물론 형제 자매까지 말입니다. 그들은 저를 통해, 저 자신과 함께 여기 있으며, 저를 지금의 이 자리에 있게 하고 오랜 세월 제게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 주신 여러분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레이즌비 1999)
가정에 헌신적인 남자라는 마이클 조던의 페르소나는 NBA를 이상화된 건전한 이미지에 연결시키는 데 이바지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깊이 각인된 남성적인 힘에 대한 인상과 흑인의 하이퍼섹슈얼리티 및 일탈에 대한 고정 관념을 확산시키기도 했다(맥도널드 1996). 가정의 행복이라는 그림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조던의 초상이었고, 그의 부모 제임스와 들로리스가 출연해온 텔레비전 광고에는 이제 아내인 주어니타까지 가세하고 있다. ‘이상화된 조던 가족의 초상’이라는 이미지가 얼마나 자주 되풀이되고 널리 알려졌는지는 ‘아버지 제임스가 어린 시절 자신들에게 감정적 학대를 가했다’는 조던의 여동생 들로리스 조던의 폭로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주는 화목한 인상이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가정적 평온함과 넉넉함이 전해지는 장으로서 조던 가족을 특징짓는 일이 이미 습관처럼 굳어져 있었기 때문에, 가부장적 지배에 억눌린 들로리스 판 가족 초상은 간단히 묵살당했다. 예컨대 조던이 <래리 킹쇼>에 출연해, 아내 주어니타가 비잔 향수 광고에서 맡은 역할을 설명하면서 그려 낸 가족상은 이런 것이었다.
비잔 씨가 아내에게 광고 건을 제의했고, 제 삶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고 생각한 아내는 기꺼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농구는 물론 아닙니다만, 아내와 아이들을 포함한 제 개인적인 삶은 분명 변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런 변화를 저로선 도무지 알 수 없는 부분까지 누구보다도 잘 알아차리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녀가 함께함으로써 농구만이 아닌, 마이클 조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그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저는 매우 놀랐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녀가 개인적인 삶을 진정 즐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그녀가 그 동안 웅크리고 있던 골방이나 껍데기에서 정말 벗어나고 싶은 건지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어요. 그녀가 세상으로부터 실컷 이용만 당할지, 아니면 정말 제대로 성공할지는 다음 문제죠.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광고에 참여함으로써 농구에서 벗어난 마이클 조던의 진면모를 보여 주는 데 기여하고 싶어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은 그녀도 마찬가지이리라 생각합니다. (킹 1999)
여기서 나타나는 조던의 초상은 흑인 남성성을 나타내는 매혹적인 이미지로서, 친근하고 예민하기까지 한 새 시대의 남성상과 겹쳐진 가족적 친밀감을 담고 있다. 흑인 남성성을 일탈적이고 범죄적이라 보는 인종주의적 공격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조던이라는 상품 기호는 탁월한 운동 선수이자 가정에 헌신적인 남자를 나타내면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욕망을 끌어들이고 있다(잭슨 1994).
가족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마이클 조던의 이미지는 수없이 많다. 1996년 10월 1일에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조던 가정 문제 연구소 개소식이 열렸는데, 이 연구소는 “가정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일들이 실행에 옮겨져야 한다”는 조던의 확고한 믿음을 바탕으로 설립되었다(조던 가정 문제연구소 1998). 또 조던과 주어니티는 볼 파크 프랭스 광고에 아들 또래의 어린 아이와 함께 출연했는데, 이 광고의 헤드 카피는 다음과 같았다. “볼 파크 프랭스를 즐기세요. 저지방 클래식, 어린이용 펀 프랭스 등 맛있는 볼 파크와 함께 가정의 가치를 맛보세요.” 이러한 슬로건은 다시 한 번 조던을 최근 가장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이미지- 영원한 가정의 가치가 깃들인, 화목한 가정 생활의 이상화된 비전-와 연결시켰다. 조던과 가정의 가치를 이처럼 분명하게 연결함으로써, 조던이 핵가족과 관련된 대단히 돌출적이고 감정적이며 이념적인 영역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실제로 최근 미국에서는 이른바 핵가족의 쇠퇴가 신우익에 의해 복지 제도에 대한 의존, 약물 중독, “성적 타락” 등을 둘러싼 도덕적 공황의 빌미로 이용되고 있다(스테이시 1996). 또한 보수주의자는 물론 자유주의자들까지도 공립 학교에서의 성교육, 콘돔 배포, 게이의 군 입대, 낙태 허용 등을 저지하는 수단으로써 ‘가정의 가치’라는 수사를 이용하고 있다. 나아가 핵가족에 대한 형해화된 찬미는 신우익으로부터 빈곤에 대한 비난과 국가 도덕성을 실추시켰다는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는 가난한 미혼모들을 악마시하는 데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성에 따른 노동 분할과 제도화된 인종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어머니는 집을 지키고 아버지는 생계를 책임지는 이른바 핵가족의 자연스러움에 초점이 집중됨으로써, 가난한 자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는 일련의 정치·경제적 쟁점들이 가시화된다. 젠더와 (헤테로)섹슈얼리티에 대한 이데올로기들은 무책임한 가난한 여성들이 가난한 남성들을 지배·통제하고 있으며, 양자 모두 과도한 성적 충동을 자제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등의 암시를 통해 빈민층을 악마시한다(토머스 1998).
조던 가족에 대한 반복된 이미지들은 미혼 여성이 가장인 가정의 가장 비하된 이미지와 도덕적으로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조던 가는 ‘흑인 가정은 애초부터 병리적일 수밖에 없다’는 세간의 주장과는 상반되는, 흑인의 성공과 소비적 안락함이라는 매혹적인 상을 제공한다. 그럼에도 조던 가족의 행복은 중산층 사람들이 오랫동안 꿈꿔 왔던 전통적인 성적 기대치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마이클 조던의 이미지는 그를 수많은 자동차와 여가와 대저택이라는 소비적 안락함을 가족에게 제공하는 최고의 생계 책임자로 재현한다. 미혼모에 대한 악마시와는 정반대로 독해되는 조던 식 ‘가정의 행복’이라는 매혹적인 상은 미국 가정과 관련된 보수주의적 기획에 참여하고, 그것을 조장한다.